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 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728x90
    반응형

    영화 &lt;남한산성&gt;의 배경이 된 병자호란&#44; 삼전도의 굴욕

    안녕하세요. 얌얌스톤입니다.

    오늘은 남한산성의 배경이 되었던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삼전도의 굴욕 등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병헌 배우님이 나오셔서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요. 영화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은 서로 입장은 달리했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매 한가지 였던 것 같아요. 인조는 특히 실리외교를 하고 명과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자행된 인조반정을 통해서 집권한 인물이라 특히 심정이 복잡했을 것 같아요. 명과의 의리를 지키자니 이미 대세는 청으로 기울어졌고, 오랑캐의 나라와 화친을 하자니 오랑캐의 나라에 머리를 숙이는 것 같고 온갖 비난을 들어야할 판이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한산성 안에서 엄동설한에 추위를 견디며 싸운 조선의 군사들이 제일 안타까웠습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왜 남한산성으로 갔나?

    병자호란 개요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2월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인데요. 이 전쟁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청나라의 전략적 고려: 청나라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조선의 내부 갈등: 병자호란의 발발 배경에는 조선 내부의 분쟁 중인 관료 집단 간의 논쟁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료 집단 간의 갈등은 조선 정부의 무능함과 불안정성을 야기했습니다.

     조선의 거부 태도: 청나라는 기존의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지국이 아닌 군신지의로 고치고 황금과 말, 군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묵살하였고, 이러한 도전적인 태도로 청나라의 분개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나?

    청나라와의 관계: 조선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형제지국이 아닌 군신지의로 고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외교적 실책: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이 병자호란의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중지하고 '친명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로 인해 청나라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조선을 공격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갈라지다

    주화론과 척화론: 조선의 신하들 사이에서는 주화론과 척화론이 대립하였습니다. 주화론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적국과 화친을 통해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척화론은 적국과의 운명을 건 결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즈음하여 조선은 청나라와 기존의 화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을 뿐,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가장 어두운 시기에 활동한 정치가이자 학자였습니다.

    최명길 / 최명길역 이병헌 배우님

    반면에,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었습니다. 그는 중화(中華)인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인 청을 섬기는 것은 이미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은 것이므로 나라의 흥망을 돌아보지 말고 청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상헌은 영화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건 영화의 극적인 요소를 첨가하기 위한 픽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은 어떤 인물인가?

    최명길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었습니다. 그는 1586년에 태어나 164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습니다. 정묘호란 때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했다가 후금군 철수 후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주화론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적국과 화친을 통해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

    삼전도의 굴욕은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사건은 1637년 2월 24일에 발생했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59일 동안 농성한 후,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였고, 이 사건은 흔히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며, 인조의 치욕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인조가 한 삼배구고두례는 어떤 방식으로?

    삼배구고두례 또는 삼궤구고두례는 신하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예법입니다. 이 예법은 본래 신불이나 직계 존친속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하여 행하던 것이었습니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황제에 대한 일종의 의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아래와 같은데요.

    "궤"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습니다. "일고두", "재고두", "삼고두"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합니다. "기"의 호령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합니다. 이 예법은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병자호란 때 삼전도에서 행해졌습니다

     

    인조에 대한 평가

    인조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그의 집권은 실질적으로 조선 제2왕조의 창건이며,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되곤 합니다. 그는 조선 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를 시작하였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아들을 박대하고, 문치를 중시하며 국가 장악력이 좋지 않았던 왕으로도 기억됩니다. 그는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같은 대규모 침공을 받기도 하고, 여기에서 수많은 일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조는 즉위 직후 일어난 ‘이괄의 난’을 비롯해 정묘·병자호란 등 가장 많은 내우외환에 시달린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까지 유배 보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인 이 인조는 병자호란, 정묘호란과 같은 대규모 침공을 받기도 하고, 여기에서 수많은 일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 깨알상식) 인조는 어떻게 집권했나? 인조반정 에 관하여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최명길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합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은 것과, 둘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인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은 명분보다 사대주의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인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뛰는 블로그로 성장하겠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 누리시길 바래요!! 안뇽~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