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의 죽음, 조선시대 최초의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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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의 죽음, 조선시대 최초의 의문사

     

    소현세자의 죽음에 둘러싼 미스터리

    안녕하세요. 얌얌스톤입니다.

     

    오늘은 인종의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의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간 왕세자이자, 명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에 다시 와서도 아버지인 인조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느닷없는 죽음에 아버지 인조가 연루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한번 알아보도록 할게요.

    ■ 소현세자로 책봉이 되고, 청나라 인질로 보내지다

    소현세자

    소현세자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로 말할 것 같으면 인조반정을 통해 청나라를 배척하고 중립외교로 대신들의 신망을 잃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이 되었답니다. 그렇기 왕이 된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죠. 이후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고, 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많이 접하고 돈도 굉장히 많이 벌었다고 하는데요. 청나라는 자신들의 문명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문명도 흡수하며, 서양 종교인들이 살고 있는 명나라의 과학 문명도 접했다고 전해집니다.

     

    ■ 소현세자의 미스터리한 죽음

    소현세자는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기며,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습니다. 그러나 실록에는 독살의 의심이 갈 정도로 그의 죽음이 의문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인조실록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 인조실록

    ■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견제했나?

    인조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지요.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청나라에서 보내고 마침내 소현세자는 8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을 했지요. 아들이 돌아오면 반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소현세자는 그렇게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바로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의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더욱 이상한 것은 바로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 사건인데요.  뭔가 석연치 않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올빼미>>인데요. 역사 영화이긴 하지만, 스릴러나 공포 영화를 보는 듯 섬뜩했지요. 

     

    ■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실제로 관여했나?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전히 역사적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데요.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귀국했지만,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독살설이 제기되었지만,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할 동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인조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당시 소현세자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귀국 전부터 이미 병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의료 사고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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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느리 강빈(소현세자의 아내)을 죽인 인조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에게 왕위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요. 소현세자가 죽었으니 소현세자의 아들(원손)을 '세손'으로 잇게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인조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후계로 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에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계를 아예 대통에서 배제할 결심으로 강빈과 세자의 아들들까지도 모조리 제거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강씨에 대한 누명 소현세자 사후, 궁내에서 누군가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으나, 인조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을 강빈을 제거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하여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습니다. 하지만 인조의 의도와 달리, 세자빈(강빈)의 궁녀들은 이때 고문사까지 당하는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강씨가 저주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물증도 없었습니다.

     

    독살 음모의 누명 이런 가운데 1646년(인조 24년) 1월에는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런 엄청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마땅히 조사하여야 정상이나, 정작 인조는 이렇게 하지 않고 1월 3일에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 것입니다. 너무 담담하게 반응을 한 것이죠. 

     

    그렇게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1646년(인조 24년) 3월 15일, 36살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를 저질렀다는 죄목 및,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저를 못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¹라고 외친 죄목 등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뒤 사사되었습니다. 

    (+ 깨알상식) 인조반정에 대하여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 김유 등의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입인데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습하였으나, 이후 형제들을 살해하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의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서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요.  이에 따라 서인 일파들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계해년에 일어나서 계해반정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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